利用者:祭本/新韓青年党
新韓青年党(신한청년당)は、1918年8月に中国の上海で組織された[1]日本統治下朝鮮の独立運動団体である。1919年の三・一運動前後に大規模な活動を行った。党首は呂運亨。呂運亨、韓鎭敎、張徳秀、金澈、鮮于爀、 趙東祜の6人が発起人である。そのほかにも1919年4月に 徐丙浩、 金九、李光洙、シン・ミョンホ[2]等が活動に加わった。
党の綱領は「大韓独立・社会改良・世界大同」の3つであった。 1918年12月には独立請願書を米国のウッドロウ・ウィルソン大統領に渡し、1919年1月には金奎植をパリ講和会議に派遣して朝鮮の独立を要求した[3]。 また東京、ロシアの沿海州、南北アメリカとも緊密な連絡網を構築した。1919年、新韓青年党の活躍で日本では朝鮮からの留学生たちが二・八独立宣言を発表し、朝鮮で全国的な三・一運動が起こる震源となった[4][5]。
本団体の構成員らは、1919年4月11日に樹立された大韓民国臨時政府の主軸を成した[5] 。臨時政府はパリにいた金奎植を外務総長に任命し、独立請願書を提出させた。その後1922年12月、大韓民国臨時政府の自主解散命令により解体された。
歴史
[編集]創立
[編集]新韓青年党は1918年8月20日頃、上海に開設されたフランスの租界で、呂運亨、鮮于爀、韓鎭敎、張徳秀、金澈、趙東祜の6人の発起により設立された[6][7]。創立の中心人物である呂運亨は1914年に中国へ亡命して金陵大学を卒業し、上海で 협화서국(協和書局, Mission Book Company)이라는 기독교 서적 출판 판매공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 1918년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상하이에 들른 장덕수를 만났다. 2人は独立運動の方略を話し合った結果、長期戦にならざるを得ない独立運動において、青年による独立運動が特に重要だという認識を共有した[6]。 当時上海に滞在していた金澈、鮮于爀、韓鎭敎、趙東祜らもこれに賛同し、彼ら6人が発起人となって新韓青年党を創立した[8]。 彼らは最初「党名」なしに毎週土曜日に定期的に会議をもち、討論を交わした。「新韓青年党」の名称は1918年11月に急遽つけられたもので、呂運亨がトルコの政治家ケマル・パシャの「青年トルコ党」にヒントを得て、これを模倣してつけたものである[9]。当時、上海では青年トルコ党員が10余名も活動していた。呂運亨は、同じ外国人留学生のアーメル・ベイ(Armel Bey)等から青年トルコ党の存在と組織について聞き、これを参考にした[10]。
新韓青年党の創立目的を趣旨書で見ると、「独立を完成させ、独立を回復した後は文化的、道徳的に民族を改革し、新大韓民族を作り、学術と産業を起こして実力を養成し、大韓民族の新文化が全人類に偉大な幸福を与えるようにする」とされている[3] 。また趣旨所で明らかにされている新韓青年党の理念は 民族主義(独立思想)、民主主義、共和主義、社会改革主義、国際平和主義などに要約できるものであった[3]。新韓青年党は「大韓民族の独立を勝ち取り、共和政体の民主主義国家を樹立し、社会の全部分を時代の潮流に合うよう適切に大改革を断行して、大韓民族がつくった新文化が全人類に貢献するよう国際協力を行う祖国を建設する」とされた[3]。
組織構成
[編集]創立時の党員は6名であったが、金奎植のパリ講和会議への派遣が議論された1918年11月下旬ごろには、党員は約20名に増加していた。そして翌年には、党員は約30~50名まで増加した。新韓青年党は、初期には党員がごく少数であったため、部署を定めず、呂運亨が代表兼総務として党の全ての事務を担当した。しかしその後、党員が増加し独立運動が本格的に展開されるようになると、1918年11月下旬~12月末に党憲を制定して綱領を文書化し、組織を体系化して部署を定めた。党憲は、党の目的と組織を規定した。[3] 党綱領は次の通り。
- 大韓国独立の完成を祈図すること
- 内外の新旧思想を取捨融合して健全な国民思想の基礎を確定し、学術と技芸を奨励して世界の文化に貢献するとともに、사회 각 항 제도개량하여 세계의 대세에 순응함.
- 世界大同主義の実現に努力すること
党憲・党綱の次には組織体系を再整備し、総務制を廃止して総裁・理事長・理事制を実施した。総裁は空席として、理事長には新入党員の金奎植を推戴した。理事の部署としては庶務部、交際部、財務部を置き、庶務部では徐丙浩、交際部では呂運亨、財務部では金仁銓を担当理事として選出した[10] 。こうして、1918年8月の創立直後には主に呂運亨と張徳秀が党の業務を行っていたが、1918年11月下旬からは呂運亨、徐丙浩、金仁銓の3人が党務を行う組織体系が形成された[11]。
三・一運動での活動
[編集]新韓青年党は同済社の若いメンバーで構成された小規模の青年独立運動団体であったが、創立の翌年に起きた二・八独立宣言と三・一運動の主導的役割を果たし、臨時政府樹立にもこのうえなく大きな役割を果たした。
独立請願書の発送
[編集][[파일:신한청년당 제출 13개조.jpg|섬네일|300px|오른쪽|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
第一次世界大戦が1918年11月11日に終結すると、米国大統領のウィルソンはすぐに大統領特使チャールズ・クレーン(Charles R. Crane)を中国に派遣して、終戦後の講和会議に対する米国の立場を説明させ、中国も代表を派遣するよう勧告させた[4]。クレーン特使が上海に到着すると中国側は米国特使訪問歓迎会を開催したが、これに新韓青年党代表の呂運亨も参加した[4]。この席で「パリ講和会議では、敗戦後の植民地の処理原則において、民族自決が議論される可能性がある」というクレーン特使の演説を聞いた呂運亨は、クレーンの宿舎を訪問し、朝鮮民族代表の派遣も可能であるか否かを訪ねた[12]。クレーンからは「米国政府の意思はわからないが、個人的には支援する」という応答が得られたため、呂運亨は新韓青年党の会議を招集してこの問題を議論した。会議では、天津に居住している金奎植をを大韓民国臨時政府代表としてパリ講和会議に派遣[12]することと、万が一旅費を用意できずに代表を派遣できなくなる場合に備え、新韓青年党総務・呂運亨の名義で独立に関する請願書2通を作成し、クレーンを通じて1通はウィルソン米国大統領に、もう1通はパリ講和会議に届けることが決定された[4]。呂運亨はこの決定に従い、独立に関する同一内容の請願書2通を英文で作成し、そのうちの1通はクレーンを通じてウィルソンに送った[4]。この文書はしっかりと届けられた。もう1通は、中国代表団顧問としてパリ講和会議へ出向いたトーマス‣ミラードに委託された[12]。しかしこちらの文書は、ミラードが日本の横浜港でカバンを紛失したため、講和会議に届けられなかった[12]。
パリ講和会議への代表派遣
[編集][[파일:Korean representatives on the 1919 Paris Peace Conference.jpg|섬네일|오른쪽|350픽셀|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과 한국대표단.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여운홍, 오른쪽 끝이 김규식, 중앙은 대표단 고문 블레베씨 부부. 뒷줄 서 있는 사람 중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관용, 세 번째가 조소앙, 맨 끝이 황계환.)]]
동제사 수장 예관 申圭植の指導を受けた新韓青年党は、協議の結果、英語に堪能な金奎植を、新韓青年党に入党させるとともに理事長に推戴し、新韓青年党代表かつ大韓民国臨時政府代表としてパリ講和会議に派遣することを決定した[4]。 그 경비는 장덕수를 극비리에 국내에 파견하여 조달하였고, 1919年 2月1日 배편으로 上海を出発した。新韓青年党がパリ講和会議に朝鮮民族代表として金奎植を派遣した事実は、その後の三・一運動において重大なことであった。この事実は、朝鮮の市民と独立運動家、在日本留学生らに密使を通して伝えられ、한국민족은 파리에서 김규식의 주장과 선언이 한국민족 전체의 의사를 세계에 명확히 알리는 목적을 포함해서 3.1운동에 봉기한 것이었다. 新韓青年党の大韓民国臨時政府代表・金奎植の派遣は、三・一運動に決定的となる、重要な契機と求心点を提供したのである[13]。金奎植は1919年 3月13日、目的地のフランス・パリ市に到着し、中央シャトーダン通り38番地の家を借りて、平和会議韓国民代表館を設置し、朝鮮独立に関する請願書を講和会議に提出した[13]。金奎植は뒤이어 대표단에 합류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 이관용, 김복, 황기환, 조용은[주해 1], 여운홍 등의 도움을 받으며 1919년 5월 10일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13] 또한 대표단은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하여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하여 각국대표들 및 언론인들에게 배포하여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13]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도착하여 활동했으나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파리위원'의 정위원으로, 이관용을 부위원으로 임명하였다.[14]
국내에 당원 파견
[編集]신한청년당은 3.1 운동의 추진과 관련하여 국내에 당원 장덕수,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주해 2], 백남규 등을 파견하였다. 신한청년당은 장덕수를 국내에 두 차례 파견하였다.[15] 제1차 파견은 1918년 12월 경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 경비를 염출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장덕수를 부산에 파견했던 바 장덕수는 3000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가지고 돌아왔다. 제2차 파견은 일본에서 유학생을 만나게 한 후 경성부로 들어가게 했는데, 인천에서 일제에게 체포당했다.[주해 3] 신한청년당은 또한 선우혁을 1919년 1월에 국내에 파견하여 강화회의 파견 사실을 알리고, 이것이 기다리던 기회이니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종용하도록 하였다.[15] 선우혁은 신민회 때의 동지인 양전백, 이승훈, 강규찬, 안세환, 변인서, 이덕환, 김동원, 도인권, 김성탁, 윤원삼 등을 만나 독립만세 시위운동과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관한 적극적 찬동을 얻고 경성부를 거쳐 돌아왔다.[16] 그 후 선우혁의 귀국에 호응하여 평안도 및 평양에서는 기독교들과 숭실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준비되다가 천도교 측으로부터 연합전선 형성의 제의를 받게 되었다.[16] 신한청년당은 또한 김철을 국내에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오도록 하였다. 국내에 들어온 김철은 천도교측을 만나서 독립운동 자금 3만원을 각출하여 송금하기로 약속받고 돌아왔다. 신한청년당은 이밖에 국내로 서병호, 김순애, 백남규 등을 연이어 밀파했는데, 서병호와 김순애는 대구지방에 들어가고 백남규는 호남지방에 들어가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과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파견 자금지원을 종용하였다.[17]
일본에 당원 파견
[編集][[파일:Yi Gwang-gu 1919.png|섬네일|오른쪽|160px|일본에 가서 2.8 독립 선언을 낭독한 춘원 이광수]] Template:참고
신한청년당은 1차로 조용은을, 2차로 장덕수를, 3차로 이광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종용케 하였다.[6] 조용은은 1919년 1월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재일본 한국인유학생들을 만나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음을 알리고 본국으로 가는 길에 먼저 일본에 파견되어 도쿄유학생들과 만나서 2월 8일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한 통보를 접수하고 일본에서 긴급히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 800원을 조용은에게 위탁하여 상하이로 보내었다. 장덕수는 일본에서의 사명을 수행하고 국내로 들어가 2월 20일 경성부에 도착한 다음 인천에 잠복해 있다가 일제 총독부 당국에 체포당하였다.[6] 이광수는 1919년 1월 상하이를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서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6]
기타지역에 대표 파견
[編集]신한청년당 당수인 여운형은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 파견[16] 하여 이 지역에 체류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동포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 파견을 알리고 이것이 독립운동 봉기의 절호의 기회임을 설명하여 독립운동을 고양시킬 것과 동시에 파리시에 있는 김규식 등 대표단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오도록 하였다.[4] 여운형은 1919년 1월 20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먼저 만주 지린성 지방으로 가서 여준 등을 비롯하여 이 지방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파리강화회의가 기회임을 설명[16]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 여운형은 이어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이동녕, 박은식, 조완구 등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의 파견을 알리고 연해주의 한인 대표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권고[16] 하였으며, 이것이 독립운동 봉기의 절호 기회임을 역설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16] 그들 중 다수가 상하이로 와서 함께 독립운동을 대폭 강화할 것을 약속하였다.[4]
또한 여운형은 이곳에서 1개월간 체류하는 동안 간민회 회장 김약연과 총무 정재면을 만나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4][16] 했으며 일부는 상하이로 오기로 약정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었다.[16] 여운형은 또한 당시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 사령관 가이다(체코인)를 찾아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협조를 얻고,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한국독립을 주창하는 선전문을 영문으로 작성하여 수만 매를 연합군들에게 배포하여 독립운동 홍보활동을 수행하였다.[주해 4] 신한청년당의 1918년 11월부터 1919년 2월까지의 활동은 1919년 3.1 운동과 독립운동의 비약적 고양에 하나의 진원을 이루고 매우 커다란 활동을 했다.[4]
상해 임시정부 수립
[編集]3.1 운동 직후, 신한청년당은 4월 10일 ~ 11일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6] 신한청년당이 3.1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각지에 파견했던 당원들이 3월 하순에 모두 상하이로 들어오자 신한청년당은 프랑스 조계 안에 임시 독립사무소를 차리고 4월 1일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다.[6] 당원 중에는 조용은처럼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과 여운형처럼 '임시정부는 명칭이 과대하니 새로운 대정당을 조직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다수가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했기 때문에 결국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여운형에게 약속한 바와 같이 다수의 지도적 독립운동자들이 상하이에 모이게 되었다.[6]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만주,연해주 등 각지역에서 온 29인의 지도적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하여 임시의정원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중에서 9명이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6] 그리고 최초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에서는 신한청년당 간부들이 크게 활동했다.[6] 행정부에서도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은 외무총장으로 기타 간부들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차장급으로 참가하였다.[6]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단순화 말하면 처음에는 신민회 구간부들을 총장급으로 하고 신한청년당 간부들을 차장급으로 하여 조직된 특성을 갖고 이 체제가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로의 수립 개편 때까지 지속되었다.[6] 신한청년당은 그 후에도 언제나 임시정부를 성원하고 옹호하는 노선을 취했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에도 창조파의 최고간부로 선출된 김규식과 그 부인 김순애를 제외하고는 여운형을 비롯한 거의 모든 당원들이 개조파에 가담[18] 하여 임시정부 해산에는 강력히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개조에 의한 강화 발전을 주장하였다.[6]
자진 해산
[編集][[파일:신한청년.jpg|오른쪽|280px|섬네일|1919년 12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인 『신한청년』의 창간호 표지이다. 주필은 이광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12월 1일부터 기관잡지로서 《신한청년》을 창간, 발행하였다.[19] 또한 신한청년당은 종래의 '상해고려교민친목회'를 개편 강화해서 '상하이대한인거류민단'을 창립하여 여운형이 단장, 선우혁이 총무를 맡아서 한국독립과 교민권익을 위해 활동하였다.[20] 신한청년당은 또한 1920년 8월 미국 위원단이 베이징에 오자,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그들을 만나 한국독립에의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6] 또한 1922년 1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제3인터내셔널' 주최의 '동방피압박민족대회'(일명 극동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리게 되자 신한청년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대외적으로 얻기 위한 차원에서 김규식과 여운형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하여 활동케 하였다.[6] 신한청년당은 또한 1922년 11월 당원 김구의 제의에 의해 한국노병회를 창립하고 독립전쟁을 위한 실력준비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6]
그러나 신한청년당은 1922년 12월 중순 상하이에서 자진하여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6] 그 이유는 외국에서 신한청년당의 외교활동과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혼동한 결과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 그 자체를 혼동[6] 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임시정부측에서 원로인 신한청년당의 해산을 요망[4]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이 임시정부에 의하여 한국대표를 겸하게 되었고 또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겸하게 되었으므로 한국의 실정을 자세히 모르는 외국인들은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를 자주 혼동하였다.[6] 또한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가 모두 상하이에 있었다는 사실도 혼동의 한 요인으로 작동하였다.[6]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1922년 12월 중순 서병호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일부의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해산 요망을 받아들이기로 결의[4] 하여 1922년 12월 해산하였다.
평가
[編集]新韓青年党が行った運動は、三・一運動を引き起こす最初の震源を形成[6]した。新韓青年党は、パリ講和会議に代表を派遣して活動させ、在日本朝鮮人留学生たちの二・八独立宣言発表や、沿海州ニコリスク(現 ウスリースク)での1919年2月25日の大韓独立宣言大会開催を促した[6]。沿海州朝鮮人代表のパリ講和会議派遣を促し、沿海州における独立運動高揚を鼓舞したほか、北間島における大韓国民会組織と独立運動高揚、戊午独立宣言書発表の契機を与えた[6]。 1919년 4월 10일 ~ 11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만들어 초기 임시정부에 적극참가했으며 상하이에서의 대한인거류민단 조직과 한국노병회의 조직도 주도하였다.[6] 이 밖에도 신한청년당은 중국, 미국, 소련 등에서의 각종 대회와 사절단 등에 대하여 활발한 독립외교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상하이 신한청년당의 당원은 약 50명에 불과해 규모면에서는 한계가 있었으나, 청장년 독립운동가들의 정수는 모두 망라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6]
같이 보기
[編集]참고자료
[編集]- 제17권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Ⅱ-중국·미주·일본 - 신한청년당의 조직과 독립운동
- 《한국독립운동사사전 1Template:깨진 링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
- 《한국독립운동사사전,3-7 :운동·단체편(1-5)》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01 》, 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저. 성균관대학교출판부(SKKUP)
- 《애국지사 조동호 평전》, 이현희 저. 솔과학
- 《한국근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년
-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1(역비의책 16)》,역사비평사
외부 링크
[編集]- 신한청년당 창당과 유정 조동호의 항일운동 조동호 선생의 아들 조윤구씨 블로그
주해
[編集]- ^ 조소앙의 본명이다.
- ^ 김규식의 부인이다.네이버 인물캐스트 참고.
- ^ 이후 장덕수는 전라남도 하의도에서 총독부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거주제한을 당했다.
- ^ 당시 러시아에는 적백 내전이 발발했는데, 시베리아에는 '체코군단'과 백군이 활동했었다.
각주
[編集]분류:1918년 설립 분류:1922년 폐지 분류:한국의 독립운동단체 분류:한국의 독립운동 분류:대한민국 임시정부 분류:정당 분류:3·1 운동 분류:일제강점기의 정당 분류:한국노병회 분류:청년당
[[Category:政党]] [[Category:大韓民国臨時政府]] [[Category:朝鮮独立運動]] [[Category:1922年廃止]] [[Category:1918年設立]]
- ^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1(역비의책 16)》 p187, 역사비평사”. 2013年10月20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11年2月19日閲覧。
- ^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 2013年10月20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11年3月9日閲覧。
- ^ a b c d e 引用エラー: 無効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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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グです。「강령
」という名前の注釈に対するテキストが指定されていません - ^ a b c d e f g h i j k l 引用エラー: 無効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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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グです。「도올
」という名前の注釈に対するテキストが指定されていません - ^ a b “계간 광장. 3호.”. 2013年10月20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11年2月18日閲覧。
-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한국독립운동사사전,3-7 :운동·단체편(4),p 337~ p 339》,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
- ^ 引用エラー: 無効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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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グです。「사전
」という名前の注釈に対するテキストが指定されていません -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01 》, 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p108
- ^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저. 성균관대학교출판부(SKKUP)
- ^ a b 引用エラー: 無効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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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グです。「조직
」という名前の注釈に対するテキストが指定されていません - ^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Ⅱ-중국·미주·일본 - 제1부 1910년대 중국관내 항일운동 제3장 대동단결선언과 신한청년당 p91
- ^ a b c d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Ⅱ-중국·미주·일본 - 제1부 1910년대 중국관내 항일운동 제3장 대동단결선언과 신한청년당 p97
- ^ a b c d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Ⅱ-중국·미주·일본 - 제1부 1910년대 중국관내 항일운동 제3장 대동단결선언과 신한청년당 p99”. 2013年10月22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11年2月18日閲覧。
- ^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김희곤 저. p94
- ^ a b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Ⅱ-중국·미주·일본 - 제1부 1910년대 중국관내 항일운동 제3장 대동단결선언과 신한청년당 p101
- ^ a b c d e f g h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Ⅱ-중국·미주·일본 - 제1부 1910년대 중국관내 항일운동 제3장 대동단결선언과 신한청년당 p103
- ^ 네이버인물캐스트
- ^ 해체위기 딛고 일제의 '심장'을 폭파하다
- ^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Ⅱ-중국·미주·일본 - 제1부 1910년대 중국관내 항일운동 제3장 대동단결선언과 신한청년당 p109
- ^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Ⅱ-중국·미주·일본 - 제1부 1910년대 중국관내 항일운동 제3장 대동단결선언과 신한청년당 p109